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미군 (문단 편집) === [[양심적 병역거부|집단적 병역거부]] === 미국 내에서는 "[[Fuck the Draft|징병제 엿먹어라]]"라는 구호 아래 청년 남성들이 징집을 거부하고 반전 운동에 가담하면서 미국은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예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도망가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사이버펑크]]의 시초인 [[뉴로맨서]] 작가 [[윌리엄 깁슨]]도 이 당시, 미국에서 태어나 전쟁반대를 외치며 캐나다로 이민 간 경우다. 당시 신병교육대는 [[시애틀]]에 위치해 있어서 불과 90분만 차로 이동하면 캐나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캐나다를 떠돌면서 히피 문화를 실천하며 막장에 가까운 히피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사회 부적응자로 살며 마약 중독 등에 빠져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전쟁이 막바지였던 1969년도에는 미군에 의한 강간, 민간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 불평등한 징병제[* 가난한 사람들은 최전선에 배치되고, 부유한 사람들은 미국 본토 또는 안전한 후방에서 장교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등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그 누구도 전쟁에 참전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 내에서 [[병역기피|징병을 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을 배신자, 탈영병, 겁쟁이 취급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가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킨 이들이 보여준 용맹으로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젊은이들이 모두 캐나다 시민권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고 단 25%에게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들을 전부 사면했고, 이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례도 적지는 않았다. 의외로 21세기의 미군들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캐나다로 도망치는 경우가 꽤 되는데, 곧 만기 전역자들의 모든 [[인사명령]]을 중단시켜버리는 것(Stop and Cut) 때문이다. 이는 제 2의 베트남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라크 전쟁에서 전투병력이 부족했던 미국이, 전역예정자들의 전역을 미루면서 발생한 일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베트남전 미군에는 당시 소수의 이중국적자,미국 영주권자, 캐나다 본토 등의 캐나다인 자원병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제 임무를 다하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귀환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료함, 대의, 공산주의 견제 등 여러가지 이유로 참전했으며 훗날 참전자의 Canadian troops in vietnam의 수기로 공식화됐고 캐나다에도 이들의 전적비가 있다. [[미국]] 내부의 상황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래 부병제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국민의 군 복무를 법으로 강제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징병제]]와 같으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는 방식이다. 미국의 부병제는 베트남 전쟁 이전까지는 미혼 남성을 동원 목록 최상위에 두고, 자식이 없는 기혼 남성을 그 밑에, 그리고 자식을 둔 기혼 남성을 목록의 가장 하위에 둔다는 원칙을 줄곧 고수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이후 수많은 남성들이 동원을 피하기 위해 섣불리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 발생하자, 1965년 8월 26일 오후 5시, [[린든 존슨]] 대통령 본인이 "'오는 자정부터 결혼 여부 및 자녀 유무를 군 복무 관련으로 전혀 법적 반영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또한 미국의 경우, 부병제가 있던 당시에는[* 사실 지금도 명목상으로는 미국에서 부병제가 유지되고 있으나 현재 미군은 오히려 매년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이들을 처리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된 관계로 자연히 법적으로 동원이 강제되었다는 사례는 나오지 않고 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오지로 동원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주 방위군(National Guard)으로 자의적으로 들어가 복무하는 일이 잦았는데, [[미국 정부]]는 60년대 후반 즈음 주 방위군 소속 부대 일부마저도 베트남으로 파병 보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기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합계 출산율이 3명대를 웃도는 베이비붐 시대로 유소년인구비중이 높았는데 이 조치가 미국의 출산율을 끌어내리면서 베이비붐 시대를 종식시키는데 한몫했다는 평이다. 물론 이 한가지만 결정적으로 작용한것만은 아니고 피임약의 시판으로 성해방 바람 및 오일쇼크 등의 경기침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것이기는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